이야기가 있는 함안 여행. 함안군민들의 건강증진과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공간 함주공원

지명유래

함안군

함안(咸安)과 칠원(漆原)은 통폐합되기 이전(1906년)까지는 별도의 군현(郡縣)인 관계로 지명(地名)에 따른 유래와 변천과정을 달리한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함안과 칠원은 다같이 삼한중(三韓中) 변진(弁辰) 12국은 ①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밀양지방) ②접도국(接塗國-칠원지방) ③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지방) ④고순시국(古淳是國-진주지방) ⑤반로국(半路國-성주, 성산, 초계지방) ⑥낙노국(樂奴國-하동군 악양면)⑦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고령지방) ⑧감로국(甘露國-김천군 개령면 감문지방) ⑨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 ⑩주조마국(走漕馬國-김천군 조마면, 합천군 초계면, 김해지방) ⑪안야국(安耶國-함안지방) ⑫독로국(瀆盧國-부산 동래, 거제지방)이다. 위와 같이 접도국(칠원)과 안야국(함안)은 학자들의 비정(比定) 의견이 일치함을 알 수 있으며, 후에 가야시대(가야시대)가 열리면서 함안은 아라가야(아라가야)의 고토(古土)임을 삼국유사(三國遺史)나 조선사략(朝鮮史略)의 5가야조(五伽倻條)에 기술하고 있다.

당시 함안은 어떤 위치에 있는 국가였을까? 경상남도 상권 제3편에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서 신지(臣智)의 우호(優呼)를 가진 국명(國名)은 구야진지렴(狗耶秦支廉)과 안야척지(安耶척支)로 김해와 함안 등지는 해상교역을 통해서 예부터 중국 군현(郡縣)과 기타 지역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고 했으며, 울산대 김태식 교수의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란 논문에서「......특히 "일본서기(日本書記: 720년)" 흠명기(欽明紀)를 통하여 6세기 전반 가야지역에 위치한 13개 소국은 고령 이남의 낙동강 서안지방에 한정되며,그 중 530년대에 신라에 의해 점령된 창원 이동(以東)을 제외한 함안 이서(以西) 지역이 끝까지 독립 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본다.

또한 후기 가야 13국중 안라국(함안지역)의 왕은 백제왕과 대등하게 병기되기도 하고 다른 소국 지배자들로부터 가야지역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되고 있어 안라국이 가야 전체지역에 대한 공동맹주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포상팔국(浦上八國)과 아라가야간의 3년 전쟁사가 있다. 그것은 10대 내해왕(奈解王) 14년(A. D 209) 남해왕 일대에 위치한 포상팔국이 연합하여 아라가야를 침공, 가야의 구원 요청에 따라 신라 태자 우로(于老), 이벌찬(利伐), 이음(利音) 장군 등 6부 군사가 포상팔국을 격살하고 6천명의 가야 포로 병사를 귀환시켰고, 3년 후(A. D212년)에도 포상삼국이 침공하자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물계자가 갈화성(竭火城)에서 적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興利伐利音將軍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奪所虜六千還之」 -三國史記 新羅本紀 奈解尼師今14年條(209年)-
「八浦上國同謨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王孫奈音 率近君及六部 軍往救遂敗八國兵」 -三國史記 列傳 勿稽子傳(209)-
「後三國, 骨浦, 染浦, 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帥 勿稽子斬獲數十餘級」 -三國史記 列傳 勿稽子傳(21년)-

물계자가 자기 처에게 「浦上 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물계자전)」라 했던 것으로 보아 2차 갈화성 전투가 치열한 혈전이었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함안에는 성산, 봉산, 동지, 성점, 방어산, 포덕, 문암 등 7개와 칠원에 무릉(武陵), 안곡(安谷), 덕남(德南) 등 3개, 총 10개의 산성(山城)과 함안, 칠원의 2개의 읍성(邑城)만 알려져 있을 뿐 갈화성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미루어 갈화성이 인근 시.군에 있었으리라고 비정되며 이 비정이 적중 할 경우 현존(現存)하는 많고 거대한 가야시대 고분(왕릉)이 의미하듯 당시 함안의 진정한 실세(實勢)를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안이 신라의 영토가 되었을 때 함안군은 2개의 현(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의령현(宜寧縣)과 현무현(玄武縣)이 그것이다. 의령현은 원래 장함현(獐含縣)이였으나 경덕왕 때 이 이름으로 고친 것으로 지금의 의령지방을 말하며, 현무현도 소삼현(召縣)이였던 것을 역시 경덕왕 때 현무현으로 고쳐졌고, 고려에 가서는 소삼부곡(召部曲)으로 강등된다. 「玄武縣本新羅召縣景德王改名後降爲召部曲)」-咸州誌古跡條-

현무현은 지금의 어디 지방일까? 오늘의 함안은 바다와는 무관하나 위에서 보듯이 당시는 중국의 군.현들과 해상교역을 했었고, 남해안 소국들과 3년 전쟁을 치루는 등 해상권 장악에 국운을 걸었음으로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쉽게 추측 할 수 있다.

경상남도 상권 제3편에 「走漕馬國은 金泉郡 助馬面, 혹은 陜川의 草溪, 혹은 金海 등으로 말하고 있으나 走漕馬는 召으로 召은 함안군의 영역이였던 현무현 이다. 흑은 지금의 鎭東方面이 포함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옛 지명에 향(鄕), 부곡(部曲), 소(所)가 있었다. 이것은 주로 하층민인, 노예, 반역민, 천민들의 집단거주지로 신라 때부터 조선초 중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하급 행정구역이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들과는 달리 집단 수용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무기 농기구 유기 자기 토기 등을 생산하던 일종의 공업단지 민으로 사회변천에 따라 신분 이동(승격) 현상과 사회발전의 일면으로 파악되어 왔으나, 15세기 말부터 고적(古蹟)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칠원에 1개의 향(鄕)과 부곡(部曲), 함안에는 2개의 부곡과 5개의 소(所)가 있었다. 그것은 우질포항(于叱浦鄕): 在縣北二十五里, 부곡부곡(釜谷部曲):在縣南七里 -漆原邑誌-

본산부곡(本山部曲): 在郡西二十里卽今安道里本峴, 감물곡부곡(甘勿谷部曲), 본산부곡(本山部曲): 간곡소(杆谷所): 在郡南十八里卽今竝谷里大峴, 지곡소(知谷所): 在郡三十七里卽今山足里知谷村, 추자곡소: 在郡二十里卽今竝谷里추子谷村, 비리곡소(比吏谷所): 在郡西三十七里卽今比里谷里, 손죽소(損竹所): 在郡西四十里損竹村 -咸州誌-

지명(地名)으로서 함안은 아시랑국 아나가야(阿那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咸安), 함주(咸州), 금라(金羅), 사라(沙羅: 載勝覽), 파산(巴山), 칠원을 칠토(漆吐), 칠제(漆堤), 칠원(漆原), 읍호(邑號)에 구성(龜城), 무릉(武陵)이었다고 함주지와 칠원읍지는 기록하였으며, 접도국(接塗國), 안야국(安耶國) 가라(加羅) 등도 함안의 옛 지명이다.

함안이란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최초로 불리워졌고,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함주로 개칭되었다가 현종 9년(1018년)에 다시 함안으로 고쳐지며, 파산은 여항면의 봉수대가 있는 산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함안조씨(咸安趙氏), 함안이씨(咸安李氏)가 한때 본관으로 쓰기도 하였고, 금라(金羅)는 공민왕(恭愍王) 22년(1373년)에 고을 사람 주영찬의 딸이 명나라에 들어가 궁인이 되어 총애를 받으므로써 지군사(知郡事:郡守)로 승격되고, 이때에 함안의 별호(別號)로 금라(金羅)라 하였다.

칠원도 신라 초기에는 칠토이던 것을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칠제로 고쳐 의안군(義安郡)의 領縣이 되고, 고려 태조23년(940년)에 비로소 칠원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군현(郡縣)의 예속, 통폐합 등이 여러 번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년)의 경남 군현을 보면 1목(牧), 3도호부(都護府), 7군(郡), 16현(縣) 중 함안은 7군에, 칠원은 16현에 포함되어 있으며, 성종 17년(1486년)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경상우도(慶尙右道)의 2진(鎭), 2도호부(都護府), 1목(牧), 5군(郡) 14현(縣) 중 함안은 군에 칠원은 현에 속해 있는데, 칠원은 고종 27년(1890년) 군으로 사용한 흔적이 있으나, 1895년 최초로 군으로 승격되어 기본적인 행정구역과 지명의 변경은 없었다.

함안은 정구(鄭逑) 군수가 부임하여 지명을 다소 바꾸었다. 이때 변경된 지명은 도사(桃沙)가 백사(白沙)로, 산팔(山八)이 산족(山足), 평관(平館)이 평광(平廣), 아도(阿道)가 안도(安道), 남산산(南山山)이 남산(南山), 아니대(安尼大)가 안인(安仁), 산법미(山法彌)가 산익(山翼) 등으로 변했다.

당시(1572년 戶口調査) 인구는(칠원제외) 15,969명(남 8,177명 여 7,729명) 보다 829명이 많을 뿐이다. 행정구역에서도 칠원은 상리면(上里面), 서면(西面), 북면(北面), 구산면(龜山面) 등 4개 면인데 비해 함안은 17개 리(里), 148속방(屬坊)이었다.

함안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물이 역류(逆流)하는 특이한 지세이다. 즉 남에는 여항산(艅航山), 서에는 방어산(防禦山), 동에는 청룡산(靑龍山:爵大山)이 솟아 있어 함안천(咸安川), 서천(西川),남강(南江)이 정북(正北)으로 흐르다가 낙동강(洛東江)과 합류하여 북동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역류지형(逆流地形)을 뜻으로 바르게 하고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거 산이 높은 남쪽을 "뛰어 넘는다"는 뜻의 방언이 여(餘)자와 배 항(航)자를 써서 여항(餘航)이라 하였으며,(지금은 나룻배 여 "艅"를 쓰고 있음)산이 적고 지세가 낮은 북쪽을 "산을 대신 한다"는 뜻으로(산이 있음은 지형의 높은 의미함) 대신 할 대(代)자와 뫼산(山) 자를 사용하여 대산(代山)이라 하였다. 또한 동쪽의 산인은 산익(山翼?), 안인(安仁) 두 면이 합하여 산인(山仁)이라 하였으나, 원래 자구산(紫丘山: 紫陽山)과 화개산(華蓋山) 아래에 위치한 함안의 관문인 관계로 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어진 마음을 가진 화평한 마음을 누리고자 뫼산(山)자와 어질 인(仁)자를 써서 산인(山仁)이라 하였고, 함안이란 다 함(咸)께 화합하여 안가태평(安家太平)을 기원하는 뜻에서 다함(咸)과 편안(安)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래 된다.

함주지에 이르기를 "옛 부터 도읍(都邑) 거의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아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형성되어 왔다. 유독 함안만은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아 고산계곡이 동남에 이루어져 물이 북으로 흐른다. 서북은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없어 광활한 평야를 이루는데, 홍수 때마다 강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된다. 이리하여 군(群)은 애초부터 서북의 리명(里名)에 산(山)자를 넣어 불렀으니 산팔(山八), 죽산(竹山), 남산(南山), 대산(代山) 등이 그것이다. 또한 마륜리(馬輪里)는 바퀴가 굴러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산이 높아 말이 가희 굴렸다고 한다. 동남의 대부분 마을에 곡(谷)자를 넣어 병곡(竝谷), 비리곡(比吏谷), 대곡(大谷)이라 했다.

여항산(餘航山)이 있는데, 여(餘)자는 「뛰어 넘는다」는 방언(方言)으로 산이 낮아 배가 건너간다는 것이니, 산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배가 가희 넘나든다는 말함이다. 대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음은 좋지 못 할 것이나, 넓고 거친 것이 마치 고개에서 물이 흐르는 것과 같으며, 이미 정해진 것을 일시 거짓 이름으로 바꾸어 옛적의 실제 형태를 어지렵혔구나, 이것이 어찌 풍수설(風水說)이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西北高而東南下故建都設邑皆面南而背北然而咸郡獨東南高而西北下東南則諸山連峙衆壑北流西北則平原廣野無高山峻領時因積雨江溢成海是以置郡之初凡里之在西北者皆稱山曰山八曰竹山曰 南山曰大山曰代山是也又有馬輪里輪者轉也謂山高而馬可轉也里之在東南者皆稱谷曰竝谷曰比吏谷曰大谷是也 又有餘航山餘方言謂之越也言山低而舟可越也蓋惡南高而北下也洪荒一判流峙旣定欲假一時虛名以眩萬古之實形豈非風水之說有以致然耶 -咸州誌(天下地之勢)-

이와 같이 함안은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세지만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천혜의 고장으로 평야가 넓고 비옥(肥沃)하며, 수원(水源)이 풍부하여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예나 다름없이 함안은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육로를 제외하고는 양강(兩江)을 이용한 수로가 발달하였고 두 개의 봉수대(烽燧臺: 巴山, 安谷山)로 긴급 통신망을 구축하였으며, 지금은 남해안고속도, 구마고속도, 국도고속도, 국도 5호선, 지방도 1004호선, 1011호선, 1032호선, 1035호선, 1040호선, 1041호선을 비롯 경전선 철도 등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만을 이루어 인접 대도시와 시간생활권(時間生活圈)에 속한다.

위치도 경남 중심부로서 동경 128˚ 25″, 북위 35˚14″으로 동은 칠원면 무기리로 창원군과 마산시, 서는 군북면 박곡리로 진양군, 남은 여항면 주동리로 창원군, 북은 대산면 하기리로 의령군과 각각 접하고 있는데, 한 때 함안군으로 경남도청 이전설(移轉說)이 나돌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대개가 그러하듯 고산준령보다 민둥산이 많아 하천이 굽이굽이 돌아 완만히 흘러 홍수 때면 피해를 입기 마련인바, 함안은 더욱 그러했다.
이로 인하여 예부터 자연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투쟁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이어 지겠지만, 제방축조 이후 메기가 침만 뱉어도 침수된다던 법수, 대산면이 옥토가 되었다.
치산치수(治山治水)가 고대국가(高大國家)의 통치이념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함안의 제방축조도 아라가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특기(特記) 한 것은 칠원의 구성제(龜城堤)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으로서의 제방이란 구전(口傳)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이나 비변사승록(備邊司勝錄)에 수리시설에 대한 기록과 영. 정조(英正祖) 재임시 낙동, 남강의 치수사업에 관한 것도 보인다.

함안의 제방축조에 있어 1900년경 왕명으로 쌓은 칠서면 회산리의 안기제(安基堤)기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함주지 및 칠원읍지 제언조(堤堰條)에 지동제언(池洞堤堰:함안면 소재), 가천택(可泉澤: 군북면 소재), 삼도지 또는 내천지(蔘島池, 內泉池: 군북면 소재), 성현언(峴堰: 함안면 소재), 백사제언(白沙堤堰: 가야읍 소재), 유동제(柳洞堤: 칠원면 소재 一周 280척), 상당제(上塘堤: 一周 400척), 검단제(檢丹堤: 칠북면 소재 一周 323척) 등을 기록하고 있다.

본격적인 제방 축조는 일제시(日帝時) 26개소에 62km(몽리 면적 3,504 Ha), 해방 후 51 개소에 146km(몽리 면적 2,898Ha)를 축조하여 「둘안, 「개간지」같은 새로운 지명이 생겨나게 되며, 직할하천(直轄河川) 3개소(낙동강, 남강, 함안천-56.7km)에 제방 40,849km, 준용하천(準用河川) 32개소(179,6km)에 제방 173,98km(약 540리)이다. 이것은 지류하천(소하천)을 제외한 것으로써 국내 최장(最長)의 제방 소유군인 것이다.

방, 리, 면(防里面)의 변천은 어떠했을까?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별표1」의 17리(里) 중 하리(下里)가 산내(山內), 산외(山外)로, 대산리(代山里)가 내대산(內代山), 외대산(外代山)으로 분리되고, 리(里)가 면(面)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개 면이 된다. 그런데 영남읍지 함안부사례(嶺南邑誌咸安府事例) 등 일부 문헌에는 18 개면만 기록하고 평광면(平廣面)이 빠져 있으며, 우도영지선하(右道嶺誌選下)에 평광면 대신 구대곡(舊大谷)으로 되어 있어, 1900년을 전후하여 이웃 대곡면에 통합 된 것으로 보이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평광은 최단명(最短面)의 면이 되는 셈이다.

그 후 1906년 9월 14일 칙령(勅令) 제96호로 진주군의 상봉(上奉), 하봉(下奉), 상사(上寺), 3면(面)과 칠원군(漆原郡)을 제외한 상리(上里), 서(西), 북(北) 3개 면이 함안군에 통폐합되어 25개 면을 거느리는 웅군(雄郡)이 되지만 이로써 칠원군을 폐군이란 종지부를 찍어 그 생명을 다 하게 된다. 그러다가 8년 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며, 이로부터 4년 만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에 의해 상봉. 하봉. 상사 3개 면을 다시 진주에 환속시키고 영산군(靈山群) 길곡면(吉谷面)의 내서면(內西面)의 예곡리(禮谷里) 일부를 편입, 면 통폐합을 비롯하여 면명(面名) 개칭 등 큰 개혁이 실시되어 오늘과 비슷한 11개 면, 92개 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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